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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게임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는가

  • 작성일: 2012년 9월 11일 오후 11:28

원래 우리 집안은 게임을 잘 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만 사셨던 인천 할아버지댁에도 게임기가 있었는데, 명절이나 방학 때 가면 별풍선을 쏘고 싶을만큼 경이로운 할아버지, 할머니의 게임플레이 개인화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슈퍼마리오같은 아케이드 게임부터 헥사같은 퍼즐류 게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으셨는데, 패드를 잡고 계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MIC를 잡은 에미넴, 키보드를 잡은 IF, 오공을 잡은 방하윤처럼 그 위용이 다가서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정말 어렸을 때 할머니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게임 하시다가 이제 어머니랑 같이 상차리셔야 한다며 일어나시려는 할머니를 붙잡고 “일은 엄마가 다 하게 하고 할머니는 계속 게임하시면 될 거 같아요.”라며 어린 내가 스스로 패드립을 익히게 해주셨을 정도로 할머니의 게임은 몰입감과 경이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버지 또한 대단한 실력자이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하시던 게임보이류 게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온라인게임에도 능하셨다. 카트라이더의 경우에는 별장갑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별장갑 바로 밑인 무지개장갑이라는 쾌거를 이뤄내시며 임요환이 10년 뒤에나 꿀 수 있는 40대 프로게이머의 꿈을 꾸고 계셨다. 아버지가 L3 맵에 어지러움만 느끼지 않으셨다면 카트라이더계는 문호준과 아버지, 마흔살 가까이 차이나는 이 양대산맥으로 재편됐을 것이다. 제 분수를 모르고 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보잘것 없는 내 친구놈에게 “부스터를 쓰지않고 박살내겠다.”시며 예고관광 뒤 격퇴해버리신 무자비함으로 한 때 ‘빌리지의 악마'로 명성을 휘날리셨다.

내 동생 또한 무자비하기 그지 없다. 그와 같은 게임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실체를 알 길이 없었으나, 과거 함께 놀이동산을 갔던 어린 시절, 놀이동산 내 오락실의 철권 게임기 앞에 자리잡은 뒤, 중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전자들의 간판을 부숴버리며 정확히 14연승을 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 왜 이 놈이 성적이 떨어지는지 알겠구나....”라며 부모님과 함께 동생에 대한 투자 철회를 논했던 경험이 있었다. 14연승 후 오락실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브로커 강씨의 마음으로 동생에게 고의패배라는 승부조작을 권한 뒤 쓸쓸히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왜 나에게는 이러한 게임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열의는 누구보다 뛰어나 오락실 게임, 게임보이 게임, PC 온라인 게임 등에 모두 도전했으나, 빛을 본 게임은 거의 없다. 특히 대학 와서는 내가 지인들에게 항상 어떤 게임을 전파하지만, 더딘 발전으로 인해 나만 도태되는 패턴을 보여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간 첫 레이드에서 “영던에서도 나오는 브레스를 못 피하시면 어떡합니까!”라는 공대장의 매서운 육성 쿠사리에 지려 은퇴한 와우, 부족한 재능을 first mover advantage로 극복하고자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들었지만 결국 ‘맹독충 깎던 노인’, '맹독충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오명만 얻은 채 쓸쓸히 은퇴한 스2, 국내 정발 직전의 북미서버부터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밑천 다 드러난 롤. 고등학교 이후 최근 게임만 추려봐도 그 끝은 항상 최연소 퇴물 타이틀이었다.

최근 접하기 시작한 지랄같은 애니팡 또한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이딴 장황한 글도 미친 게임 애니팡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다보니 이 꼴이 난 것이다. 원래 퍼즐류 게임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미친 게임은 엿같은 랭킹 때문에 도전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게다가 나같은 재능없는 열정류 인간에게는 한없이 많이 필요한 하트도 제한적이라,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채 비굴하게 개처럼 빌며 하트를 구걸해야하는 끔찍한 상황도 간혹 나오게 된다. 슬픈 일이다. 5만점 넘기기도 쉽지 않고, 가끔 개뽀록으로 10만점이 넘으면 혼자 승리감에 도취하여 환호하지만, 그 직후 바로 뜨는 주간 순위와 지인들의 점수를 바라보면, 10만점에 환호했던 내 자신은 한없이 작아진다. 애니팡에 갓 뛰어든듯한 사람들도 나보다 주간순위가 높음을 확인하며 내 눈가는 오늘도 촉촉해진다. 나보다 스무살은 더 많으신 우리 고모는 게임 가문의 위력을 과시하시듯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점수로 주간순위에 자리잡고 계신다. 신은 왜 나에게 열정만 주고 재능을 주지 않으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