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단편 모음

  • 작성일: 2012-2013 (단편별 기재)

작성일: 2013년 11월 17일

alt text

몽테스키외 삼권분립 타법의 소유자, 사이클링 땅볼 기록 보유자, 배트에 공이 맞지도 않았지만 상체는 이미 1루로 뛰고 있는 자, 왠지 끝까지 포텐 터지지 않은 채 2020년쯤 "오늘은 30대 후반의 엘지 유망주, 이대형선수의 은퇴식이 있겠습니다."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야구 역사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던 이대형이 엘지를 떠났다.
내가 예전부터 엘지의 3대악이라고 평하며 개무시하긴 했지만, 남은 두명의 악과는 다르게 깝대는 나에겐 애증의 존재였다.
어차피 맨날 초구 건드리고 죽어서 응원가 제대로 다 부른 날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그 응원가 부를 날이 더는 없다는건 제법 아쉽다.
'빠른 발의 이점을 살려 잠실 맥주돌이를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엘지에서 안고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수많은 댕이어빠 얼빠들의 숙원인 하체고정은 나이 서른 먹고 기아에서 이룰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대형에게 내 마지막 애정이 담긴 그림판 헌정작을 바치며 그를 보낸다.


작성일: 2013년 6월 23일

"아빠, 황성무는 왜 한강행을 택한거죠? 그는 잘못한게 없잖아요?"

"그는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공무원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그렇단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떨어뜨린거다. 그는 공무원이 아닌 조심스럽고도 묵묵히 우리를 보호하는 구원자이자 선지자, 황크나이트이기 때문이지."

황성무: 누구든 공무원이 될 수 있어, 소년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다독여주는 것처럼 사소한 일을 하는 사람도 공무원이지.


작성일: 2013년 6월 17일

이에 등지가 "승상, 방하우스의 갬블러들은 게임하는 동안 친한 척을 일삼고 선의와 계평을 남발하는데 어찌 사람좋다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명이 가로되 "선제께서 붕어하시기 전 이르시길 그들은 반골의 상이요, 게임 중에는 의상과 연기력으로 혼란을 주고, 게임이 끝나면 땡값 추징과 사채놀이로 인해 그 즉시 생면부지의 남보다 못하게 될 것이라 하셨으되, 어찌 그들의 행동이 진실되다 할 수 있겠소?"라며 고개를 저었다.


작성일: 2012년 12월 10일

맥도날드에서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계산 후 잔돈으로 받은 동전들과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합치니 천원이 살짝 넘었다.
알바생에게 동전들을 주며 천원짜리로 바꿔달라고 했다. 근데 바꾸고 나니 지갑 안 천원짜리가 다섯장이 넘게 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알바생에게 오천원짜리로 바꿔달라고 했다. 알바생의 동공이 잠시 흐려졌지만, 이내 서비스업 종사자의 운명을 깨닫고는 저항없이 순순히 바꿔줬다.
미안한 마음으로 오천원권을 받아든 그 순간, 왠지 아까 지갑 속에서 오천원권을 봤던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열어본 지갑 안엔 아까부터 계시던 율곡 이이께서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니가 나를 만원짜리로 바꿀 용기가 있을까?"라며 나를 비웃기까지 하셨다.
심각한 내적갈등 끝에 나는 전주 이씨 조상님께 후손의 용기를 증명하고자 어쩔 수 없이 알바생에게 만원짜리로 바꿔달라고 했고, 나는 세트메뉴 처먹는 내내 나를 야리는 알바생의 시선을 감내하는 조건으로 만원짜리를 집어들 수 있었다.
근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율곡 이이는 덕수 이씨였다.


작성일: 2012년 8월 25일

학교 가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여성이 과거 알라딘이 입었을법한 모양의 바지를 입고 있다. 쌩 파란색이다.
근처에 있기 다소 부담스럽지만 내가 패션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저 유행인가보다 생각하며, 그녀가 그녀의 백에서 터번을 꺼내 태연하게 두르는 상상을 애써 억제한다.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뒤. 디테일함은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계통의 알라딘 바지, 이번엔 빨간색 버전을 입은 여성이 버스에 탄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순간, 그녀들은 숨겨뒀던 샴시르를 꺼내 누가 진정한 아라비아의 적자인지 결판이라도 낼 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강렬한 색감대비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몰래 사진이라도 찍고 싶지만, 좀 전에 본 주한이의 페북글이 떠올라 자제하기로 한다.
원래라면 나는 이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려야하지만, 혹시나 노란색 알라딘 바지가 이 버스에 타서는 "빨강, 파랑 나와! 진짜는 나다!"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설레임에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적통을 건 한판 승부의 결과는 뉴스에서 확인하기로 다짐하고는 두 정류장이 지났지만 침착하게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가기로 한다.


작성일: 2012년 8월 4일

며칠 전 오후 11시 50분, 매우 야심한 시간.
중3인 동생이 갑자기 "아 나 갑자기 삘 꽂혔어."라며 내 폰으로 지 친구에게 전화를 걸더니 인삿말이나 앞뒤 설명없이 대뜸 "고음대결 하자."고 한다.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을 보며 당연히 동생 친구는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동생 친구는 "진성? 가성?"이라며 대결종목을 묻는다.
"남자는 진성이지."라는 동생의 말에 동생 친구는 후속 반응 없이 바로 "도~"로 스타트를 끊었다.
오후 11시 50분. 이웃의 수면권 보장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이 대결의 승자는 동생의 친구였다.
통한의 패배를 맛 본 동생은 패배를 하자마자 용건이 끝났다며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태연하게 다시 자기가 하던 일을 한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느낀다. 중학생 때엔 친구를 잘 만나야된다.
내가 중학교 때 잘못 만난 자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아직도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작성일: 2012년 7월 23일

버스 안. 내 옆에서 통화하시는 분은 전문적으로 과외수업을 하시나보다.
학생에게서 과외시간을 바꿔달란 요청 전화가 왔는지, "잠시만.. 아이패드 좀 꺼내고."라며 아이패드를 꺼냈다.
스케쥴관리 어플같은걸 띄울 줄 알았는데 종이노트에 줄 그어놓고 만든 스케쥴표를 아이패드 카메라로 찍어놓은 사진파일을 띄우더니, 언제 언제 될거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간을 협의한 이후에는 가방에서 종이노트를 꺼내더니 연필로 스케쥴표를 수정한다.
그리곤 수정해놓은 스케쥴표를 다시 아이패드 카메라로 찍는다.
당신에게 아이패드가 있다는건, 당신의 할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


작성일: 2012년 4월 14일

중학생인 동생의 학교에서 당뇨병 검사를 위한 단체 소변검사를 했나보다. 그런데 자신들의 당뇨 여부가 밝혀지기를 꺼려하는 일부 학생들이 (대체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당뇨는 아닌 것 같은 내 동생에게 (그들의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궁금하다.) 자신들의 종이컵을 동생의 노란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길 원했나보다. 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거부할 수 없었던 동생은 결국 무상소변 조례안을 자체 통과시키고, 일종의 재능기부를 통해 무려 네다섯명에게 빈부에 따른 차등 없는 노란 은혜를 난사했다고 한다. 급한 것도 아니었다던데 그 짧은 시간동안 본인 것을 포함하여 최대 여섯컵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왜 수많은 재능들 중에 동생에게 하필 이런 재능을 골라서 준 것일까. 어쨌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 예수가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을 동생이 행했다고 하니 한편으론 뿌듯하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적발해냈다는 보건 선생님이 더 대단하다.


작성일: 2012년 1월 17일

얼음낚시를 다녀왔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물고기놈들은 나를 포함한 낚시대를 NPC마냥 흔들어제끼고 있는 수백명의 영장류 호구들을 농락했다.
그들은 야심차게 미끼로 달려드는 듯 하더니, 미끼 바로 앞에서 90도 드리프트를 하며 광속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모은 드리프트 게이지로 부스터를 쓰며 내 미끼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가끔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은 주최측에서 풀어놓은 알바들이 아니었을까, 혹은 주최측이 물 안에서 물고기 홀로그램을 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물고기가 봐도 딱 티 나는 가짜 지렁이 모양을 한 내 미끼가, 물고기들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달려들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고혹적인 매력을 뿜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은 한마리를 낚았다. 근데 그것도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 아니라, 바늘이 물고기 배때기에 걸려서 올라온 것이다.
근데 동생은 물고기가 작기 때문에 풀어주겠다며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드라마의 주제는 생명존중인 것 같다.
근데 지가 낚으면서 찢어버린 물고기 배때기는 생각나지 않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