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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소녀 네티와 비운의 한 초딩

  • 작성일: 2011년 6월 5일 오전 1:58

학교에서 후배들과 옛날 만화 드립치던 도중,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예전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눈높이의 가정방문 교육처럼 미술을 방문해서 가르쳐주는 '색동이 미술교실'이라는 것을 약 1년 정도 이용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천사소녀 네티 마지막 편을 방영하는 대망의 그 날, 색동이 선생님께서는 개인 사정이 있으시다면서 예고도 없이 30분 일찍 와버리시는 바람에 단 한편도, 단 1분도 빼놓고 본 적이 없었던 천사소녀 네티 마지막 편을 통째로 못 보게 돼버렸다.

지상파 만화영화의 마지막 편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을 어필하며 선생님과 어머니에게 제발 이거만 보게 해달라고 인간의 존엄성을 버린 채 개처럼 빌며 사정했지만, 선물로 미술용 토시를 주겠다며 선생님은 얄팍한 술수로 나를 달랬고, 토시에 대문짝만하게 '색동이'라고 쓰여있는 그 촌스런 노란색 비닐 토시에 현혹당하신 어머니께서는 매정하게 티비를 끄시고는 아들을 미술에 정진하게 만드셨다. 조조에게 투항하는 서서의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수업에 임하게 됐던 나는 그 날 수업 시간에 4B 연필로 일직선 긋는 연습을 했었는데, 꺼져있던 우리집 TV 브라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안에서 셜록 부자에게 무슨 해코치를 당하고 있을지 모를 나의 네티를 걱정하며 스케치북에 많은 눈물자국을 수놓았었다.

다음 날 친했던 친구, 그리고 그의 동생과 함께 등교하는 길에 마지막 편 어떻게 끝났냐고 물으니 친구 동생은 셜록이 네티를 권총으로 쏴 죽여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줬었고, 학교에 도착해서 반 친구들에게 진실을 듣기 전까지는 셜록새끼 때문에 벌집이 되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을 네티, 그리고 홀로 남겨져 어딘가에서 로드킬 당하거나 아사했을 고슴도치 루비를 추모하며 나라 잃은 백성처럼 오열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보지 못한 마지막 편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집 근처 비디오가게를 어슬렁거리며 천사소녀 네티가 비디오로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몇 달, 비디오가게 밖에 붙어있는 새로 입고된 비디오 목록에 천사소녀 네티가 적혀있는걸 보고 희망찬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비디오 가게 주인의 아들이며 나와 친했던 형이 그 가게의 카운터를 자주 봤었는데, 천사소녀 네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나를 보며 "혹시 여자들이나 좋아하는 그런 만화 보려는건 아니지?"라며, 마치 내가 그걸 잡기라도 하는 순간엔 에미넴 앞에 서 있는 파파독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듯이 폭풍 디스를 장전하고 있었다. 그런 굴욕적인 분위기 속에서 초3 사나이 자존심에 차마 네티를 집을 순 없었기에, 피눈물을 머금으며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별로 관심도 없던 황금동자 소야를 빌려서 나왔었다.

동네 형 앞에서 남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비운의 선택을 한 나 자신, 그리고 어찌 된게 제대로 된 비디오가게가 동네에 달랑 하나밖에 없었던 이 비극적인 촌동네, 그리고 남자색깔과 여자색깔, 남자만화와 여자만화가 구분되어있던 당시의 참혹한 사회환경을 원망하며 쓸쓸히 귀가한 뒤 집에 있던 큰 베게를 미친듯이 후려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곤 그 형한테 복수한답시고 그 비디오를 지금까지 반납하지 않고 있다. 물론 몇달은 자의였고 그 이후론 잊고 있었다가 비디오 가게가 폐업하는 바람에 반납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 연체료가 하루 백원이었으니 지금 반납하면 대략 55만원정도를 물어야 한다. 부디 당시 무지개비디오 사장님 내외 가족분들이 딱 55만원을 막지 못해서 비디오 가게가 망했다거나 생활고를 겪으셨지는 않으셨기를 바라며, 이 기회를 빌어 당시 무지개비디오 사장님에게 심심한 사죄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어쨌든 추억돋는 밤이며 나의 불운했던 과거가 떠오르는 시간이었다.